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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기도 하다. 어쩌면 두 제목간의 상관관계가 너무나도 없어 보여, 감출 수 없는 당혹감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비틀스'라는 영국의 록 밴드를 알고 있다면, 조금은 추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부제(사실은 원제가 맞다)인 노르웨이의 숲은 실제 비틀스의 옛 노래 <Norwegian wood>에서 상징적으로 원용한 것이다. 그 노래 가사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그 의미를 잘 함축하는 구절을 적어보겠다.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in) Norwegian wood.“
번역본도 있지만, 원어 그대로의 느낌이 더 의도에 부합한 듯 하다
"내가 깨었을 때 나는 혼자였고, 이 새(그녀)는 날아가 버린 후였죠.
그래서 난 불을 지폈어요, 좋지 않나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 가사는 젊은 시절의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욕망, 뜨거운 사랑과 슬픈 상실 사이의 갈등을 노래한, 이 곡의 핵심 구절이다. 즉, 이 책의 제목이 '상실의 시대'로 번역된 이유도, 원곡의 스토리처럼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글 속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 욕망, 이별, 슬픔, 고뇌, 성찰 등의 메시지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사실은 원제가 맞다)인 노르웨이의 숲은 실제 비틀스의 옛 노래 <Norwegian wood>에서 상징적으로 원용한 것이다. 그 노래 가사를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그 의미를 잘 함축하는 구절을 적어보겠다.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in) Norwegian wood.“
번역본도 있지만, 원어 그대로의 느낌이 더 의도에 부합한 듯 하다
"내가 깨었을 때 나는 혼자였고, 이 새(그녀)는 날아가 버린 후였죠.
그래서 난 불을 지폈어요, 좋지 않나요? 노르웨이의 숲에서“
이 가사는 젊은 시절의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욕망, 뜨거운 사랑과 슬픈 상실 사이의 갈등을 노래한, 이 곡의 핵심 구절이다. 즉, 이 책의 제목이 '상실의 시대'로 번역된 이유도, 원곡의 스토리처럼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글 속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 욕망, 이별, 슬픔, 고뇌, 성찰 등의 메시지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책제목 : 상실의 시대(원제 : 노르웨이의 숲)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 유유정 옮김
출판사 : 문학사상사
출판일: 2012년 7월 20일 출간(1쇄 1989년 6월 1일)
처음 이 책을 고른 이유가 바로 이 제목의 강렬함 때문이다. 다른 감정들보다 '상실'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가 살면서 느끼는 많은 감정들 중 가장 대표적인 감정이 아니었나 싶다. 사회에서의 삶을 상실하고, 일반 민중으로서의 삶을 상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도 상실한 삶은,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이다.
물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다 못해 도를 넘은 이기주의로 잘못 전이하는 현상이라든가, 무한경쟁 체제라는 단어를 초등학생들도 다수 알 정도의 피폐함이 만연한 '상실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거시적 관점이 아닌, 더 개인적| 차원의 경험적 사고로 이 책을 선택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독자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글의 서두에서부터 이 책이 사회적, 정치적인 책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서 읽혀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허나, 그는 글의 끝머리에 개인의 사랑도 시대의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고, 그 모습을 알게 모르게 반영한 결과, 모두가 '살아남는 사랑'을 하진 못할 것이란 중요한 고찰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독자는 그나 그녀가 누구이건 간에, '와타나베'라는 이름의 '나'에게 자신을 비추기 시작한다. 그 후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곧 '와타나베'가 되어 모든 감정들을 글로써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절대 글로써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특이한 일들만 골라 겪는 듯한 그의 등장인물들도, 거의 그들의 감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작가 역시 자세한 상황설명과, 정성을 들인 묘사들만 사용할 뿐,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글 어디를 보아도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인물들의 감정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된다. 독자 스스로가 이미 그 인물들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직접 모든 일들을 겪는 듯한 환상을 볼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책 읽을수록, 내 안에 그 인물들이 역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 여운은 더 오래 지속되고, 결과적으로도 '하루키 신드롬'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1987년에 발표된 이후로, 약 30년 동안 그의 작품에 매료된, 일명 '하루키 신드롬'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전 세계적으로 급증시켰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내가 관찰한 점은 2가지다.
첫째, 인간의 감정은 사회성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이를 풀어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공통되는 인간의 기본적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감정이 발달하여 사회성을 지니게 되고, 곧 인간 사회 전반을 지탱하는 주요 매개체가 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을 사회 전반적 행동에 반영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무한경쟁 체제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보편성'이라는 단어보다 '특수성'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흔히 '도태'라는 개념과 연결이 되고, 특수성은 '생존'이라는 개념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달랐다. 그는 특수성보다 '보편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감정들에 집중했다. 모두가 가진 사랑과 욕망이라는 감정, 상실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모든 독자 들에게 작품이 와 닿도록 만드는 역할을 해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독자들의 반응이다. 너무나도 와 닿고 공감되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보편성이 아닌 '특수성'으로 이해하여, 마치 자기 자신을 알고 쓴 것 같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하루키는 독자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수많은 후기를 편지로 받았다고 한다. 보편적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만의 특수한 문학적 색을 만들어낸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둘째로는, '주어진 감정'이 아닌, '독자적 판단에 의한 감정'의 중요성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작가 하루키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태도만을 정밀히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의 감정을 직접 상상하고 느끼도록 만든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여러 책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작가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하루키의 책은, 독자들이 직접 감정을 생각하고, 선택하며, 몸소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 각각의 삶의 경험들이 녹아들어가고, 재미있게도 각기 다른, 그리고 자신에게 꼭 맞는 감정을 경험한다. 즉 하루키의 소설은 슬픔과 기쁨의 기준까지 정해주는 이 시대에, 독자적인 판단을 통한 감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중요시 되어있는 사회에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보편성'이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보편성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나에게 힘들거나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같다. 이 명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힘들거나 싫은 것이 모두 보편적 감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명심하면, 다른 사람의 행동, 혹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감정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물로 '특수성'이 생기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배려심'이다.
서로 이해하며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바로 이 '보편적 감정'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능동적 판단의 중요성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사회에서 '중간만 가라, 나서지 마라' 등의 이야기들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능동적인 사람이 더 잘 적응하고 발전적이다. 수동적인 사람에 비해 능동적인 사람이 일의 효율이 더 높고, 주변 사람들의 인상에도 훨씬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보통은 능동적으로 일을 분석하고, 찾아서 하는 사람을 원한다.
이러한 현상의 예로, 력자들을 우대하는 요즘 취업시장의 풍경을 들 수 있다. 기업은 한 인간의 실패를 통한 발전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기에 먼저 나서서 해내는 일꾼을 원하는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능동적 행동을 막으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발전
한다. 우리는 더 능률적인, 그리고 더 능동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이루면서 '이해를 통한 배려심'과 '능동적인 자세, 이 두 가지를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 기억하고 싶다
처음 이 책을 고른 이유가 바로 이 제목의 강렬함 때문이다. 다른 감정들보다 '상실'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가 살면서 느끼는 많은 감정들 중 가장 대표적인 감정이 아니었나 싶다. 사회에서의 삶을 상실하고, 일반 민중으로서의 삶을 상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일상도 상실한 삶은,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이다.
물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다 못해 도를 넘은 이기주의로 잘못 전이하는 현상이라든가, 무한경쟁 체제라는 단어를 초등학생들도 다수 알 정도의 피폐함이 만연한 '상실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거시적 관점이 아닌, 더 개인적| 차원의 경험적 사고로 이 책을 선택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독자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글의 서두에서부터 이 책이 사회적, 정치적인 책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서 읽혀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허나, 그는 글의 끝머리에 개인의 사랑도 시대의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고, 그 모습을 알게 모르게 반영한 결과, 모두가 '살아남는 사랑'을 하진 못할 것이란 중요한 고찰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독자는 그나 그녀가 누구이건 간에, '와타나베'라는 이름의 '나'에게 자신을 비추기 시작한다. 그 후 소설이 끝날 때까지, 독자는 곧 '와타나베'가 되어 모든 감정들을 글로써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게 된다. 하루키 소설의 매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절대 글로써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특이한 일들만 골라 겪는 듯한 그의 등장인물들도, 거의 그들의 감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작가 역시 자세한 상황설명과, 정성을 들인 묘사들만 사용할 뿐, 감정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글 어디를 보아도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독자들은 그 인물들의 감정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된다. 독자 스스로가 이미 그 인물들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직접 모든 일들을 겪는 듯한 환상을 볼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책 읽을수록, 내 안에 그 인물들이 역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그 여운은 더 오래 지속되고, 결과적으로도 '하루키 신드롬'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1987년에 발표된 이후로, 약 30년 동안 그의 작품에 매료된, 일명 '하루키 신드롬'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전 세계적으로 급증시켰다. 이러한 현상을 보며 내가 관찰한 점은 2가지다.
첫째, 인간의 감정은 사회성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이를 풀어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공통되는 인간의 기본적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감정이 발달하여 사회성을 지니게 되고, 곧 인간 사회 전반을 지탱하는 주요 매개체가 된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을 사회 전반적 행동에 반영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무한경쟁 체제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보편성'이라는 단어보다 '특수성'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흔히 '도태'라는 개념과 연결이 되고, 특수성은 '생존'이라는 개념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달랐다. 그는 특수성보다 '보편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감정들에 집중했다. 모두가 가진 사랑과 욕망이라는 감정, 상실과 슬픔이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 것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모든 독자 들에게 작품이 와 닿도록 만드는 역할을 해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독자들의 반응이다. 너무나도 와 닿고 공감되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보편성이 아닌 '특수성'으로 이해하여, 마치 자기 자신을 알고 쓴 것 같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하루키는 독자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수많은 후기를 편지로 받았다고 한다. 보편적 감정에 충실하여, 자신만의 특수한 문학적 색을 만들어낸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둘째로는, '주어진 감정'이 아닌, '독자적 판단에 의한 감정'의 중요성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작가 하루키는 주인공의 행동이나 태도만을 정밀히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의 감정을 직접 상상하고 느끼도록 만든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여러 책들을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 작가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하루키의 책은, 독자들이 직접 감정을 생각하고, 선택하며, 몸소 체험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 각각의 삶의 경험들이 녹아들어가고, 재미있게도 각기 다른, 그리고 자신에게 꼭 맞는 감정을 경험한다. 즉 하루키의 소설은 슬픔과 기쁨의 기준까지 정해주는 이 시대에, 독자적인 판단을 통한 감정'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중요시 되어있는 사회에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보편성'이다.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보편성은 매우 큰 역할을 한다. '나에게 힘들거나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같다. 이 명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힘들거나 싫은 것이 모두 보편적 감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명심하면, 다른 사람의 행동, 혹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감정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에 따른 부수적인 결과물로 '특수성'이 생기게 되는데, 그게 바로 '배려심'이다.
서로 이해하며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는 바로 이 '보편적 감정'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능동적 판단의 중요성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사회에서 '중간만 가라, 나서지 마라' 등의 이야기들을,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능동적인 사람이 더 잘 적응하고 발전적이다. 수동적인 사람에 비해 능동적인 사람이 일의 효율이 더 높고, 주변 사람들의 인상에도 훨씬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보통은 능동적으로 일을 분석하고, 찾아서 하는 사람을 원한다.
이러한 현상의 예로, 력자들을 우대하는 요즘 취업시장의 풍경을 들 수 있다. 기업은 한 인간의 실패를 통한 발전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기에 먼저 나서서 해내는 일꾼을 원하는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능동적 행동을 막으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를 통해 발전
한다. 우리는 더 능률적인, 그리고 더 능동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이루면서 '이해를 통한 배려심'과 '능동적인 자세, 이 두 가지를 상실의 시대를 통해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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